17강. 박태균_왜 한국에는 건전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못할까?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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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제국 시대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차마 마지막 편은 보지 못했다. 그 절망적 결말을 이미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찮게 그 마지막 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난 그 과거의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는 걸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극단적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 '반전'의 가느다란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자유주의, 공화주의적 세력들의 고뇌와 좌절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강대국 열강들이 외부에서 어떠한 냉전 형성기 맥락과 시선 속에서 우리를 규정했고 우리의 자기인식과 무엇이 달랐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우리는 박태균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꽃이기보다 불꽃이 되고자 하는 역사 속 수많은 유진 초이와 고애신들을 이해하고 또 그 사이에서의 우리의 좌표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소위 '신냉전'과 '열전'의 암운이 드리운 이 비극적 시대에 새로운 반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안병진 | 정치학교 반전 커리큘럼 위원장
Interview
안병진 | 우선 저희가 역사학자이신 교수님께 강의 요청 드린 가장 큰 이유는 수강생들에게 지금의 이 문제투성이 정치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긴호흡에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장님께 제일 먼저 여쭤보고 싶은 부분은 왜 한국에서는 정상적 자본주의를 이끄는 건전한 세력이 잘 형성이 안 되는 걸까요?
박태균 | 역사적으로 보면 건국 이래 한반도에는 두 개의 기득권이 존재했는데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세력과 근대화 이후 생겨난 조선공산당 세력이 그들입니다. 전통 세력은 권력에 기반을 두었다면 조선공산당 세력은 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치를 해보려고 했던 세력이 그 당시에도 있었지만 사실상 생존이 어려웠습니다.
안병진 | 당시에도 회색빛 지식인으로 폄하되었겠네요.
박태균 | 그렇죠.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거죠. 대한민국은 그 두개의 기득권이 그렇게 서로 갈등하다 결국 남과 북으로 나뉜 겁니다.
송주환 | 저는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근대화 시기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어요. 교수님께서 쓰신 『이슈 한국사』 서문을 보면 ‘근대사는 현대에 와서 신화가 되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저는 김구와 이승만이 가장 대표적인 그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진영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지만 사실 그 둘은 당시 아주 오랜 기간 함께한 동업자였잖아요. 제가 다른 책에서 김구가 이승만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연설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마치 문성근이 노무현을 소개하는 연설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박태균 | 그렇죠.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도 사실 많은 부분이 생략된 채로 현대에 소개되고 있죠. 저는 이승만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를 했어요. 만약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51년이나 52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치력이 상당한 스타일이기는 했지만 사회를 통합하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어요. 한민당도 품지 못했고 호형호제 사이였던 김구도 배척했잖아요. 정치인이 품이 좁다는 것은 그만큼 겁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신감의 결여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본인이 자신감이 있다면 누구하고도 연정을 할 수가 있죠. 나와함께 정치를 하는 사람이 내 지분을 뺏어갈 수 있다는 그 생각이 협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DJP 연합이나 노무현과 정몽준 단일화는 자신감의 발로에서 나온 결합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런 결합들이 역사적 물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거죠. 아마 원래대로라면 이후 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때문에 이승만의 시대가 연장된 거죠.
안병진 | 그런데 한국 정치사의 역사적 인물들은 파트너십을 통한 통치에 왜 이렇게 취약한 것일까요? 이건 외교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국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박태균 | 저는 국제 관계를 보는 틀도 인간관계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보는 편이거든요. 국가도 결국 인간들이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 하나씩 주고받으면서 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외교 관계를 바라보고 또 만들어가는 데에 굉장히 취약한 것 같아요. 사실 한국과 미국은 세계적으로도 특수한 관계거든요. 이렇게 동맹 관계가 오래 가는 조합도 사실 드물어요. 동맹이라는 게 가치와 이익이 동일할 때 생겨나는 것인데 가치와 이익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미 관계역시 진영 논리를 떠나서 미국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의 것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가 70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 서로 간의 신뢰를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0년 친구인데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송주환 | 저도 하나만 더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제 전공이 브랜드인데 교수님 책과 강의를 보면서 반가웠던 것이 브랜드에 관한 관점들을 곳곳에서 발견할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브랜드에서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관계성을 굉장히 중시하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한국에는 그 두가지가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한국은 세계 속에서 어떤 국가로 보여진다고 생각하세요?
박태균 | 사실 따지고 보면 세계에는 가난한 나라가 훨씬 더 많잖아요. 어떻게 보면 과거의 한국의 포지션에 있는 나라가 정말 많은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45년 이후 자신들이 전 세계에 100개 넘는 국가들에 원조를 했었는데 한국만큼 성공한 국가가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한국이 굉장히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있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위치에 있는 만큼 그 위치에 걸맞는 책임감 있는 역할을 해야 되겠죠.
안병진 | 대한민국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는 정서적으로도 제국이 아니고 경제 모델도 성공적으로 안착이 되었고 민주주의도 나름 잘 돌아가고 있는 국가니까요.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인터뷰 감사드리고 반전 강의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