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채이배 & 이상민_왜 재정은 곧 가치인가?
채이배 | 전 국회의원
이상민 |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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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오랜 시간 학교 경영에 대한 자문의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가피하게 거의 CEO에 가까운 모든 실무를 총괄하는 부총장의 보직을 갑자기 맡게 되었다. 나는 비록 백면 서생이지만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경영 자문을 오래 했고 임명 전 스스로 미국 경영학 서적 중 90일 준비 플랜에 대한 책을 읽으며 90일간의 계획을 다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아, 하지만 타이슨이 맞았다. 링에 올라 얻어터지기 전 누구나 자신만만하다는 걸 말이다. 나에게 첫 강력한 훅은 바로 실무진이 올린 재정 현황 보고 문건이었다. 일단 용어 자체가 마치 암호 문건 같았다. 나는 결국 추상적이면서 공허한가치와 지시를 반복하는 무능력한 부총장으로 임기를 보내야 했다. 실제 가치가 현실로 구현되는 숫자는? 그건 실무자들이 알아서 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재정의 고수인 나라살림연구소 정창수 소장에게 삼고초려하며 일을 초보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이를 양산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수십 년간 이 화두를 가지고 현장에서 고투해 온 두 걸출한 고수와의 세션을 마련했다. 이 세션은 의원들이 처한 냉엄한 현실과 제약, 가치의 중요성, 조세정책, 재정의 트릴레마 등 다룰 게 너무 많다. 하지만 이 짧은 두 시간 세션에서 단 한 가지, 즉 스스로의 엄청난 한계를 절감하는 시간만 되어도 의미가크다고 생각한다. 행운을 빈다.
안병진 | 정치학교 반전 커리큘럼 위원장
Interview
안병진 | 저는 왜 선출직을 추구하는 청년들이 국가 재정에 대한 감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기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이상민 |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예산은 정치적 투쟁의 결과이자 기록이다’ 하는 말이 있어요. 좀 과하게 표현하면 저에게 2023년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639조를 쓰는 정치집단이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안병진 | 실감이 확 나네요.
채이배 | 국회의원은 입법기관으로써 법을 만들잖아요. 그리고 하나의 법을 만들면 그것을 근거로 정책이 만들어지죠. 그리고 그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 돈이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보면 결과적으로 사람과 돈을 배분하는 것이 입법기관이 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선출직을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행정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나 법 그 자체만 알아서는 안 되고요. 이 전체 과정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예산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송주환 | 우리 수업 제목이 ‘왜 재정은 곧 가치인가?’ 잖아요. 가치라는 건 결국 철학이 담긴 문제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지만 초선 의원의 경우는 경험이 없다 보니 그 과정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리고 알만 하면 임기가 다 끝나가는 상황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관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민 | 정확하게 말하자면 임기를 마무리 지을 때쯤 되면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나올 때까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상황인 게 현실입니다.
채이배 | 예결위 위원을 한다 해도 정해진 안에 대한 질문 몇 가지 그리고 삭감 및 증액에 대한 의견 정도이고 나머지 프로세스는 위원장, 간사, 정책의장, 원내대표, 당대표 정책의장 선에서 서로 협의하는 것이지 초선 국회의원은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없어요. 그러니 경험이 쌓여도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이죠.
안병진 | 그런 상황에서 선출직 정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상민 | 일단 최소한 당장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나를 속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우선 중요해요.
채이배 | 그런데 문제는 회계를 어느 정도 알더라도 국가 예산의 회계처리 방식이 기업하고도 또 달라서 굉장히 복잡해요. 그리고 딱 떨어지게 정리를 해주지 못해요. 결국 당사자가 여러 가지 재무에 관련된 표를 상호 검증하면서 이것을 파악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죠. 저처럼 회계를 전공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송주환 | 지금 말씀하신 내용에 굉장한 무력감을 느끼는데요.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이렇게 다시 여쭤봐야 될 것 같아요. 아까 2023년 대한민국 정부는 639조를 쓰는 정치집단이라고 규정하셨고 그 예산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그 방향성이 우리의 가치이자 철학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아마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그동안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재정의 철학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개별 정부마다 각자가 중시한 가치가 있었을 것 같고요. 지금 말씀하신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관료의 힘이 세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들거든요. 진보와 보수 어느 쪽으로든 말이죠.
이상민 | 저는 평소에 노무현 정부가 대한민국 재정의 기틀을 만들었고 박근혜 정부가 이것을 발전시켰고 그 혜택을 문재인 정부가 받았다고 보는데 이런 식의 정의는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굉장히 생경한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연한 내용이에요. 국가라는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연속성이 없을수는 없는 거잖아요.
안병진 | 중장기적인 재정계획을 세우는 부분은 어떻게 작동되는 건가요? 보통 정권이 들어서면 5년은 유지가 되잖아요.
채이배 | 중기 재정계획 같은 경우는 정부가 들어서면 기재부 그러니까 정부에서 만들어서 발표를 해요. 그러니까 5년짜리인 거죠. 그리고 매년 조금씩 수정 작업을 하는데 솔직히 국회에서는 그 부분을 거의 다루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해연도 다음 연도 예산만 신경 쓰지 경제 상황에 따라 워낙 변동성이 높아서 어차피 지켜지지 않거든요. 취임 첫 해에 선언적인 의미로만 사용됩니다.
안병진 | 현재와 같은 구조적 제약을 우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네요. 제 전공이 미국정치잖아요. 사람들이 보통 미국정치를 대통령 중심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미국정치의 돈줄은 의회가 컨트롤 하잖아요. 대통령도 예산 앞에서는 의회에 쩔쩔 매는 것을 잘 모르더라고요. 미국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예산이 어떻게 편성, 심사, 집행되는 지를 봐야 하거든요.
채이배 |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비교가 되면서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의 의회는 예산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예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예산을 전문적으로 이해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정부가 예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재부의 권한 안에서 이것이 작동되는 것이죠. 그러니 국회에서도 그런 기능을 갖출 필요가 없는 거죠.
송주환 | 아까 대한민국은 어쨌든 복지국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 이야기는 길게 보면 저부담 저복지 국가에서 중부담 중복지 국가로 가는 중이라는 이야기잖아요.
채이배 | 큰 틀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말 그대로 철학적인 논쟁까지 이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보통 증세를 하는 수단에 대한 논란이 소득세를 올릴 것인가 아니면 법인세를 올릴 것인가 그리고 종부세의 경우는 특정 대상을 타켓팅한 세금이잖아요. 이것들이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계속 반복적으로 수정되면서 너무 복잡해져 버렸어요. 크게 보면 하나의 방향인데 그 과정에서는 엄청난 좌충우돌이 벌어지는 거죠.
이상민 | 이 부분에 대한 복잡성은 심지어 전문가도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예요.
안병진 | 이번 세션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어떤 세션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아무튼 이번 주말에 두 분의 경험을 많이 전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